난 너와 사귀지 않을 거야.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야.
아니, 전보다 더 네가 좋아졌어!
일주일 동안 준비하면서 고백의 목표가 조금 달라진 건 맞아. 그건 내 마음을 내 안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너에게 100% 전달하는 거야.
그래서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면. 그렇게만 된다면... 너와 친구로 남아도 좋다고 생각했어. 좀 이상하지?
난 사실,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다 재수 없었어. 흔히 말하는 '입 잘 턴다'는 그런 사람들. 괜히 멋진 말 하면서 잘난 척하는 느낌이었거든. 요즘에는 그런 걸 비웃잖아. 조롱하고, 패러디하고. 그냥 재밌어서. 이 사람이 어떤 철학을 가졌든지 그냥 비웃어주면 아주 잘난 사람도 아주 쉽게, 우습게 만들 수 있더라고.
하지만 그럴수록 '말하기'가 어렵게 느껴지고,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점점 더 반감이 들고. 말과 글에 대한 거리감이 생길 뿐이란 걸 이제 알아. 넌 그냥 내가 더 알고 싶었던 거야.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마음을 알기 힘드니까...
비슷한 점이 많으면 많은 대로, 다른 점이 많으면 다른 대로... 너를 알아가고 앞으로 많이 대화하고 싶어!
너만 빗장이 풀린 게 아냐. 나도 그래.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중간에서 만나 새로운 방향으로 함께 걷게 될 거야.
완전히 모르는 사람의 비참과 가깝고 친한 사람의 비참은 그 거리의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. 이러한 거리는 컨텐츠를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, 무엇을 향유하고 무엇을 향유하지 못하느냐의 첫 번째 기준이 됩니다.
인생의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넘길 것이냐, 하는 질문이지요. 우선 문학은 거리두기가 전제되기 때문에 부조리 자체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승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합니다. -중략- 그러니까 사이다 웹소설이란 부조리를 철저히 피해 가는 방식으로 부조리를 승화하는 장르입니다. -중략- 이때 제시되었거나 예비된 부조리를 제거하는 주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, 즉 <나>의 연장선이기 때문에, 그것은 개인의 좌절을 환상으로나마 만족시켜 줍니다. 이러한 환상이 승승장구와 인정욕구의 충족과 물질적 성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21세기의 한국인이 마주하는 종류의 고통이 대체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.